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증거 ==== 고종이 청군차병을 자진했다는 증거는 조선 측 자료,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문서, 청의 문서 등 무려 세 국가에서 증거가 나오고 있다. * '''조선정부측 자료: 승정원 일기, 일성록, 고종실록 교차검증''' 보은집회 당시 1893년 3월에 고종은 청군출병 의사를 보였고 신하들이 거부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의사표명을 하며 반복적으로 의견을 구했다. >여(고종): 요충지가 모두 몇개나 됩니까? > >심순택: 수원과 용인이 직로입니다. 심영과 기영의 병정들을 먼저 수원과 용인 등지에 파견하여 주둔케 하고 경군은 상황을 보면서 조용함이 좋을 듯 합니다. > >여(고종): 경군은 절대 절대 파견할 수 없습니다. 타국의 군사를 차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나라에 전례들이 있습니다만 군을 차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 >심순택: 그것은 아니됩니다. 만약 타국 군사를 차용하면 군량을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에서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 >여(고종): 중국에서도 일찍이 영국군을 차용했던 일이 있습니다. > >정범조: 어찌 중국을 본받는단 말입니까? > >여(고종):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청병을 차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 >정범조: 청병을 차용하는 것은 비록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는 것과 다르지만 처음부터 차용하지 않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 이런 대화 내용은 승정원 일기, 일성록, 고종실록 이라는 세가지 자료에서 교차검증이 되고 있다.[*김명섭,1994,7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7][*구선희,1999,219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19][*강문호,2004,109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엄찬호,2006,5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No.25, 2006, page 5 (KCI)][*신영우,2009,19~20,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19~20, 26][*유바다,2017,336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묻더니 신하들이 거절하니 끈질기게 동일 의견을 반복하였다. 이것을 오직 의견만 구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건 이태진 등 극소수이며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 대부분의 학자는 고종이 청군차병을 원한 의지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요청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군을 실제보다 과대평가 하여) 청군차병을 요청하는 문건을 정부에 보냈고 그 사료가 남아있다.[*김명섭,1994,5~6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5~6][*강문호,2004,116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16][*신영우,2009,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6] 강문호 교수의 논문에 인용된 일본 문서와 청의 문서에 고종 측근인 홍계훈이 청군파병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나와있다. [[파일:강문호 3.png]] [[파일:강문호 4.png]] 고종이 홍계훈의 요청을 듣고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고 민영준이 위안스카이와 밀약을 한 사실도 나와있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홍계훈이 조선정부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한 사실이 주한일본공사관 측에 확실히 남아있다. 음력 4월 19일에 그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있다.[*강문호,2004,120~121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0~121][*유바다,2017,336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 일본임시대리공사가 조선 측 반응을 조사한 후 조선정부가 청병차병 방안을 채택할 것을 예상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2~223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2~223] 고종이 청군차병을 결정짓고 회의도 열지 않은 채 원세개 측에 비밀리에 파견을 하여 청병차병을 결정했다는 기록, 5월 1일 조선정부가 청국에게 공식적으로 청군차병을 요청한 상태라는 것. 조선정부가 원세개에게 출병 요청하자 다음날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가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에게 보고를 한 것. 청국이 조선의 차병안을 받아들여 군사를 출병한다는 전보를 일본정부가 받았고 휴가 중이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는 사실들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도 분명히 적혀있다.[*김명섭,1994,12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구선희,1999,225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5][*엄찬호,2006,13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13 (KCI)][*신영우,2009,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김경록,2018,37~39 김경록, 청일전쟁과 일제의 군사강점,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page 37~39] * '''청의 문서(이홍집 전집 포함)''' 1893년 보은집회 당시 고종의 청병차병안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음에도 고종이 “동학의 세가 창궐하여 충청병영의 병정으로는 진무할 힘이 없고, 경병 역시 파송할 수 없으므로 청병을 빌려서 뿌리 뽑고 자”하며 비밀리에 [[박제순]]을 파견하여 원세개에게 청 병력 파견을 의논한 사실이 기록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0~221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0~221][*김보경,2004,95 김보경, 청일전쟁전후 국제질서 인식의 변화 , 학위논문(박사)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2004, page 95][*엄찬호,2006,5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No.25, 2006, page 5 (KCI)] 1894년 4월 28일에 청병차병 공문이 완성됐음을 조선정부 측에서 사람을 보내 원세개에 알렸음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구선희,1999,226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6] 고종의 내명을 받은 민영준이 원세개와 교섭하여 4월 29일 출병동의를 얻은 것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엄찬호,2006,7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7 (KCI)] 고종이 청병차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도움으로 진압된 전례에 비추어 이번 사태도 청국 군대가 대신 소멸시켜 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한 것 이 문서에 남아있다.[*김명섭,1994,12~13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13][*구선희,1999,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7][*강문호,2004,127~128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7~128][*엄찬호,2006,7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7 (KCI)][*신영우,2009,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유바다,2017,337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7] 위와 같이 청의 문서에서도 고종이 청병차병을 요청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파일:강문호 5.png]] [[파일:강문호 6.png]] 강문호 교수의 논문에서 고종이 자발적으로 청군파병을 요청했다고 설명되는 부분. 이 논문에도 청군파병의 주체는 고종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만자라는 분량으로 이홍장전집이 새로 출간했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 박사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유바다,2017,411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411]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 박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구선희,2017,33~35 구선희의 해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정읍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age 33~35] 참고로 이홍장전집에서 일부 소수분량의 내용이 발췌돼서 문서집에 포함된 적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권의 번역집은 [[http://www.e-donghak.or.kr/dirFrameSet.jsp?item=bdata]] 이 링크에서 {{{[자료소개] [발간자료집]『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자료 다운로드) 2017-12-26 427}}}을 클릭하면 다운로드 가능하다 . 실제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에 자료집을 구할 수 있고 친절하게 자료도 다 알려준다. 구선희란 인물이 전집 해설도 해주는데 검색해보니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시고 조선과 청 관계로 박사학위논문 받은 사람이다. 이 자료집의 내용을 읽어보자. 이게 4월 28일 고종의 파병 요청을 알리는 문서이다. 문서 번호는 '''G20-04-034''' [[파일:G20-04-034.png]] 위안스카이는 문서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문서날짜는 4월 29일 문서 번호는 '''G20-04-036''' [[파일:G20-04-036.png]] 다음 문서는 4월 30일, 문서번호는 '''G20-04-037''' [[파일:G20-04-037.png]] 여기에 의하면 '''고종은 군이 패배하면 즉각 파병요청 문서를 보낼 것 이라고 위안스카이에게 전했다.''' 여기에 의하면 조선정부에선 패배하면 즉각 문서를 보낼 것 이라고 위안스카이에게 전했다. 그리고 아래가 '''G20-05-001''' 문서 [[파일:G20-05-001.png]] 사실 고종은 '''파병요청을 보낼 예정을 4월 29일에 미리 전하고 약속대로에 정식으로 전했었다.''' 문서번호는 '''G20-05-001''' 인데 고종이 청정부에게 이런 문서를 보냈다. >"‘폐국(弊國) 전라도 관할의 태인과 고부등의 현(縣)은 민풍(民風)이 사납고 성정이 음험하고 간사하여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 >몇 개월 사이에 동학에 붙은 교비(敎匪)들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현읍(縣邑) 10여 곳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지금은 다시 북으로 잠입하여 전주(全州)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전에 연군(練軍)을 파견하여 현지에 가서 토벌하고 위무토록 했지만 그 교비들은 끝내 감히 죽음을 불사하고 맞서 싸워 연군이 패배하여 잃어버린 총포 등 무기가 다수에 이르렀습니다. 이 흉악하고 완고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면 특히 우려할 만한데, 하물며 한성과의 거리가 겨우 400 하고도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만약 그들이 다시 북으로 잠입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경기(京畿) 지역이 시끄럽게 요동을 칠 것이니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 >게다가폐국의 새로 훈련시킨 각 부대는 현재의 인원이 겨우 도성을 지킬 만할 뿐이고 또한 아직 전투를 치른 경험도 없으니 특히 흉악한 구적(寇賊)을 섬멸시키는 데 쓰기 어렵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만연하면 청에 많은 근심거리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조사해 보면, 임오년과 갑신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에 전의 사례에 의거하여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귀 총리(總理, 원세개)가 신속하게 즉각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보내면 참작하여 몇 개의 부대를 보내어 속히 와서 대신 토벌케 하고, 아울러 폐국의 각 병사들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따라 익히게 하여 앞으로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사나운 교비들이 섬멸되기를 기다려 즉각 철수를 청할 것이며 감히 계속 머물러 지켜 주기를 청하여 천조(天朝)의 병사들이 외지에서 오랫동안 피로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청컨대 귀 총리가 조속히 적절하게 조력할 방안을 강구하여 급박한 형세를 구원하기를 절실하게 기다립니다'''" > >고종이 청에게 보낸 문서 '''G20-05-001'''에 수록 실제로는 4월 29일에 고종이 미리 예고를 하고 예고에 따라 정식으로 파병요청을 했었다. 예고 문서도 미리 보내고 예고한 대로 그대로 문서를 보냈다. 해제한 구선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도 G20-05-001이 조선의 청 파병 요청 근거라고 가르키고 있다. 그리고 이홍장 문서에 의하면 오히려 이홍장은 파병을 꺼리는 문서도 있다.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알아서 정리하게 두고 청군을 얼른 철수시키기를 원했다는 자료도 나왔다. [[파일:구선희.png]] 이홍장 전집같은 방대한 1차 사료를 연구한 유바다 박사의 논문은 의외로 유사역사학 커뮤니티에서 주목받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출처없는 게시글들이 더 신뢰있는 자료로 판단한다. * '''갑오실기''' >5월 1일[五月初一日] > >(…) 먼저 순변사(巡邊使)를 차송(差送)한 뒤에 원임대신이 입시하여 사사로이 뵐 때, 임금께서 청병(淸兵)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시길, “총리 원세개(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조회(照會)하는 일이 있으면 당연히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였다. 임금께서는 일본인이 인연(夤緣)하여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판부사 김홍집(金弘集, 호는 道園)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가 적도를 소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조치입니다. 일본은 우리가 처음부터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움직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보국(輔國, 보국숭록대부) 민영준(閔泳駿)이 영돈[영돈령부사] 김병시(金炳始, 호는 용엄(蓉庵))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사람까지 보내어 몰래 질문하길, “경연하는 자리에서 청병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대신이 충분한 논의가 있었는데, 합하(閤下)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어찌 어렵고 신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일본 군대도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김병시가 찾아온 사람에게 조용히 말하길, “대개 이 일은 이미 정론(定論)이 있다고 하니 억측으로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도(匪徒, 동학의 무리)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일본의 문제도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관(淸館)의 조회(照會)가 지금 잠시 늦추어졌고 이미 우리 병사도 출발하였으니, 잠시 하회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민대감[閔泳駿]께서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임금께서는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성기운(成岐運)이 청관에 가서 총리 원세개에게 조회의 건을 전달하니, ≪청관에서는≫ 곧장 천진(天津)으로 전보를 보내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청병의 전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도독(都督) 섭지초(葉志超)가 2천여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니, 이중하(李重夏)가 영접하여 머물렀다. > >갑오실기, 갑오년 5월 음력 1894년 5월 http://www.e-donghak.or.kr/ 이 자료는 저자가 미상이라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나 이 자료는 청과 일본 측 문서와 교차검증이 되며 논문에서도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근거로 사용된다.[*신영우,2009,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